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김기림 시인의 <길>: 상실과 그리움의 원형적 이미지

by soulbooks 2024. 9. 11.

서론

김기림 시인의 <길>은 길이라는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삶의 쓸쓸함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길은 단순한 이동의 경로가 아니라 화자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상실과 아픔의 흔적이 새겨진 장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화자는 이 길 위에서 어머니와 첫사랑을 잃었고, 그 길을 따라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을 견뎌왔다. 시는 상실과 그리움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길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형상화하며, 화자가 느끼는 깊은 슬픔과 고독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글에서는 <길>에서 드러나는 길의 상징성과 시적 기법을 중심으로 화자의 정서와 상실의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해보고자 한다.

1. 어머니의 상실과 죽음의 길

<길>에서 길은 화자의 삶 속에서 가장 큰 상실인 어머니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라는 구절은 화자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던 어린 시절의 장면을 회상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긴 언덕길'은 화자가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며 걸었던 길이며, 이 길은 곧 죽음의 길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화자는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떠나보냈고, 그로 인해 삶의 길 위에서 가장 큰 상실감을 겪는다. 이때의 길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비극의 무대가 된다.

 

또한, 이 길은 화자가 상실의 고통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그 고통을 안고 걸어야 했던 길로, 삶의 첫 번째 시련을 상징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화자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이후로도 화자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그리움을 품고 살아간다.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라는 표현은 화자가 어머니를 기다리며 느끼는 애타는 그리움과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아는 절망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러한 감정은 길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전달되며, 길 위에서의 상실의 경험이 화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결국, 이 시에서 길은 화자가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경험한 상실의 공간으로서, 삶의 근본적인 고독과 슬픔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김기림은 길의 이미지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이 화자의 내면에 남긴 깊은 흔적을 형상화하며, 그 상실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2.  첫사랑의 만남과 이별의 길

어머니를 떠나보낸 상실의 길에서 화자는 또 다른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첫사랑이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라는 구절은 첫사랑의 만남과 이별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여기서 첫사랑은 조약돌에 비유되며, 이는 첫사랑이 지닌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첫사랑은 어머니가 떠나간 길에서 조약돌처럼 다시 잃어버린다. 이는 첫사랑이 결국 화자에게 또 다른 상실로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첫사랑의 만남과 이별이 동일한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의 길에서 또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되지만, 그 사랑 또한 길 위에서 사라진다. 조약돌처럼 쉽게 주웠다가 다시 잃어버리는 첫사랑의 경험은 화자에게 상실의 반복을 의미하며, 그 과정에서 느끼는 허무와 고독을 강조한다. 첫 번째 조약돌이 첫사랑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면, 두 번째 조약돌은 첫사랑이 떠난 후 남은 가슴속의 통증을 상징한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사랑의 덧없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화자는 길 위에서 어머니를 잃은 상실을 경험한 후, 첫사랑을 통해 다시 한 번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겪는다. 이 두 가지 상실의 경험은 화자가 느끼는 고독의 깊이를 더해주며, 길은 이러한 감정의 무대가 된다. 김기림은 길을 통해 첫사랑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인생의 또 다른 중요한 순간을 상징적으로 그려내며, 사랑의 본질적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3.  기다림과 추억의 장소로서의 길

<길>에서 길은 단순히 과거의 상실과 이별의 공간을 넘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기다림과 추억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한다. "할아버지도 언제 낳은 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라는 구절은 화자가 여전히 그 길 위에서 돌아오지 않는 존재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버드나무는 오랜 세월을 견디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존재로, 그 아래에서 화자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긴다.

 

이 대목에서 길은 단순히 지나온 과거의 장소가 아니라, 여전히 화자가 머물며 기다리고 있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길은 지나간 시간과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며, 그 위에서 화자는 과거의 상실과 추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어둠이 기어 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라는 구절은 이러한 기다림의 쓸쓸함과 그리움이 깊어질 때마다 어둠이 찾아와 그 감정을 달래준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처럼 길은 기다림과 상실, 추억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화자의 내면세계를 반영한다.

 

김기림은 길의 이미지를 통해 화자가 느끼는 깊은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기다림의 의미를 표현한다. 길은 그 자체로 삶의 여정을 상징하며, 그 위에서 화자는 수많은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길 위에 서 있는 화자는 결국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 즉 상실과 그리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결론

김기림의 <길>은 길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고독의 정서를 강렬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길 위에서 어머니와 첫사랑을 떠나보내며 상실의 아픔을 겪었고, 그 길 위에서 여전히 그들을 기다리며 그리워한다. 시인은 길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 고독과 상실의 경험을 생생하게 형상화하며, 삶의 본질적 의미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길>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랑과 이별, 그리고 끝없는 기다림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인생의 여정을 돌아보게 하고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의 깊이를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