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김상옥 시인은 한국 현대시조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명으로, 그의 초기 시조 중 하나인 <봉선화>는 그의 등단작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1939년 문학잡지인 「문장」의 9호에 실리며 가람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김상옥의 <봉선화>는 단순히 봉선화라는 꽃을 노래하는 것 이상으로, 과거의 추억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 글에서는 <봉선화>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움의 정서와 시적 기법을 살펴보고, 시조가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1. 꽃이 피어나는 장면 속에서 드러나는 그리움
김상옥의 <봉선화>는 첫 구절부터 독자의 눈앞에 꽃이 피어나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라는 구절은 비가 온 뒤 봉선화가 절반만 피어 있는 모습을 묘사하며, 시각적인 이미지와 함께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서 '벌어'라는 표현은 '벌어져'보다 더 정감 있고 생동감 있는 시어로, 봉선화가 살짝 틈을 내며 피어나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묘사는 화자의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전이되는 중요한 시적 장치이다.
이 구절에서 화자는 장독간에 피어난 봉선화를 보며 문득 누님을 떠올리게 된다. 봉선화를 통해 누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어린 시절의 평화로운 시간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심정을 드러낸다. 봉선화라는 꽃은 단순히 여름에 피는 꽃이 아닌, 누님과의 추억을 상징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곧 이어지는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라는 구절로 이어지며, 화자의 그리움이 편지라는 형식으로 구체화된다.
<봉선화>에서 김상옥은 꽃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전통적인 시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꽃은 고유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여러 시인들에게 감정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봉선화는 특유의 섬세한 꽃잎과 붉은 색감으로 화자의 감정, 특히 그리움과 애틋함을 한층 더 깊이 전달하고 있다. 시조의 첫 부분에서 봉선화가 반쯤 피어있는 모습은 마치 화자의 마음 상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미완성의 상태, 즉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감정의 상태를 암시하며, 화자가 누님과 함께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 '꽃물 들이기'를 통해 재현된 어린 시절의 추억
<봉선화>의 두 번째 부분은 어린 시절 누님과 함께한 봉선화 꽃물 들이기의 추억을 회상하며 전개된다.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이라는 구절은 누님이 동생의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여주던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찬찬'이라는 시어는 꼼꼼하고 차분한 동작을 의미하며, 누님의 자상함과 다정함을 강조한다. 이처럼 세밀한 묘사는 당시의 정서와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하며 독자에게 시각적, 감각적 체험을 선사한다.
이 시에서 '꽃물 들이기'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서서 화자에게는 평화롭고 다정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린 시절의 소소한 일상이 이렇게 깊은 그리움의 정서로 변모하는 것은, 세월이 흐른 지금의 화자가 그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라는 구절은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현실을 교차시키며, 어릴 적 봉선화 꽃물이 들었던 손톱이 이제는 힘줄이 도드라진 나이가 든 손으로 변했음을 상기시킨다.
이 구절에서 김상옥은 '손톱에 꽃물을 들이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정서적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과거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인간적 관계와 기억의 소중함을 재현하는 것이다. '양지에 마주 앉아'라는 표현은 두 사람이 자연 속에서 나란히 앉아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그려내며, 누님과의 소통과 애정을 느끼게 한다. '하얀 손가락 가락'이라는 표현 역시 당시의 순수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상기시키며,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3. 시적 기법과 주제의 심화
김상옥의 <봉선화>는 그리움의 정서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시적 기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하마"라는 시어는 "행여나 어찌하면"이라는 뜻을 지니며, 누님이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한 화자의 불안과 설렘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러한 시어의 사용은 시의 분위기를 활력 있게 만들며, 독자가 화자의 감정에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시조의 마지막 구절은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과 현재의 현실을 대조함으로써 시간의 흐름과 그로 인한 변화를 강조한다.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라는 구절은 시적 화자가 이제는 더 이상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은 변하지만, 기억 속에서만큼은 그때의 누님과의 시간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처럼 김상옥은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통해 시간의 비가역성을 표현하고, 그로 인한 인간의 깊은 그리움을 전달한다.
또한, 김상옥의 시조는 전통 시조의 형식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감성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세 장 형식의 전통 시조 구조를 따르지만, 각 장마다 감정의 전환이 분명하게 나타나며, 독자에게 강한 정서적 반응을 유도한다. 첫 장에서는 현재의 봉선화를 통해 과거의 추억을 상기시키고, 둘째 장에서는 그 추억을 구체화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과거의 아름다웠던 순간과 지금의 현실을 대조함으로써 시간의 흐름과 그로 인한 변화를 강조한다. 이러한 시적 구성은 독자가 시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하며, 시 전체의 정서를 한층 깊이 있게 느낄 수 있게 한다.
결론
김상옥의 시조 <봉선화>는 단순한 자연 묘사를 넘어, 누님과의 추억과 그리움을 담아낸 작품이다. 비가 온 뒤 장독간에 봉선화가 피어나듯, 화자의 마음속에는 누님과의 소중한 기억들이 차오르고 있다. 봉선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개되는 그리움의 정서는 독자에게 강렬한 감정적 울림을 준다. 김상옥 시인의 <봉선화>는 한국 현대시조의 미학적 깊이를 잘 보여주는 예이며, 그 안에 담긴 정서와 시적 기법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인 그리움을 섬세하게 다루며, 독자에게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게 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치 않는 감정의 본질을 상기시킨다.